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징 전투 (문단 편집) === 난징 도양폭격 === >"'''폭격은 반드시 목표에 직격할 필요는 없으며 적의 인심에 공황을 야기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적의 방어포화를 고려하여 투하점을 고도 2~3천 미터 부근으로 선정하고, 첫번째 접근에 투하를 완료하기 위해 힘쓰도록." >---- >제2연합 항공대 참모가 배포한 '남경공습부대 제공대의 전투요령에 관한 희망사항' 1937년 8월 15일 오전, 난징에 거주하던 마지막 일본인 거류민단과 난징 대사관 직원들이 [[톈진시]]-포구를 잇는 진포선을 타고 [[칭다오시]]를 향해 출발했다. 이들 일본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가 심하여 이들이 해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중화민국 정부는 특급열차를 준비하는 한편 40명의 헌병과 2명의 외교부 장교를 수행시켜 이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이들이 떠난지 불과 3시간 후인 오후 2시 50분, 일본 해군 기사라즈 항공대 소속 [[G3M|96식 육상공격기]] 20기가 난징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82%AC%ED%95%98%EB%9D%BC_%EB%8F%84%EC%BF%A0%EC%8B%9C|가사하라 도쿠시]]가 지은 남경사건에선 당시 난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37년 8월 15일 [[난징시|남경]]의 [[동지나해]]에는 태풍이 몰고 온 비구름이 상공에 낮게 깔려, 성밖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유명한 자금산을 덮은 검은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전월 7일의 [[노구교 사건]]과 이틀 전의 [[제2차 상하이 사변|제2차 상해사변]] 발발을 계기로 본격화된 중일전면 전쟁의 전운이 중국의 수도까지 이른 것을 알리는 듯한 먹구름이었다. 열대 고기압이 가져온 고온, 고습도의 공기가 남경시민의 기분을 불안하게 불쾌하게 했다. (...) 점심식사와 낮잠을 자고 끝내고 오후에 직장으로 돌아온 직후 남경시민들은 갑자기 울리는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와, 비구름에 덮인 남경의 하늘을 뒤흔들며 울려 퍼지는 폭격기의 포효에 금세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 떠들썩하게 외치는 소리가 도시를 뒤덮은 가운데, 시민들이 유아와 노인을 데리고 밖으로 뛰쳐나와 급하게 만들어진 근처 방공호로 뛰어들어갔다.|| ||남경사건, 가사하라 도쿠시, 어문학사. 25~26페이지|| 이들 기사라즈 항공대는 8월 15일 오전 9시 10분, [[나가사키]] [[나가사키 공항|오무라 기지]]에서 발진하여 960km를 4시간 동안 비행하여 난징을 폭격한 것이었다. 기사라즈 항공대는 난징의 군사공항인 대교장 공항과 민간공항인 명고궁 공항, 대행궁, 제1공원, 신가구 등의 주요 시설과 그 인접 민가에 60킬로그램 짜리 육용 폭탄을 투하하고 법원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이때 남경시립도서관이 폭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중앙연구원 생물연구소 도서관도 폭격당해 3만권의 장서와 생물 표본들이 소실되었다. 폭격은 40분 동안 계속되었고 중국 측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은 공전의 전과를 세웠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일본 측 피해도 없진 않아 폭격기 4기가 격추되고 6기가 중국 측 반격에 파괴되어 작전 불가능 상태가 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이는 일본 측이 중국군의 방공력을 깔보아 폭격기를 호위할 전투기를 대동시키지 않았으며 성과 욕심에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측은 도양폭격을 야간공습으로 변경해 실행하고 부득이하게 낮에 폭격하게 될 경우 500m 상공에서 폭격했던 1차 폭격과는 달리 3천미터의 고고도 폭격을 실시하게 했다. 하지만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일본측 피해는 은폐하고 호외를 발행하여 이를 칭송했으며 해군성도 '세계 항공전 사상초유의 대공습'이라고 선전하며 이를 자랑했다. 이때 일본 제국은 중화민국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이었다. 이는 명백히 전시 국제법의 개전에 관한 협약과 육전 법규관례에 관한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은 이걸 소년 잡지에까지 실었다.(...) 사실 이 난징 도양폭격은 전날인 8월 13일에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나가사키에서 비행기가 뜨지 못해 연기된 것이었다. 8월 14일엔 [[타이베이]]에서 출격한 제3공습부대 소속 18기의 비행기가 [[항저우]], 광더(현 [[안후이성]] [[https://ko.wikipedia.org/wiki/%EC%89%AC%EC%95%88%EC%B2%AD%EC%8B%9C|쉬안청시]]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B%8D%94%ED%98%84|광더현]])를 공습했다. 일본 해군의 이러한 폭격은 해군의 실적을 과시하여 해군 군비확장을 꾀하려는 것으로 전쟁이 터지기도 전인 1936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또한 수도를 공습함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국지적 해결을 모색하던 정부와 참모본부의 의도와도 배치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거의 매일 난징에 대한 야간공습을 실시하였는데 8월 27일의 폭격에는 오전 1시 40분, 2시 40분, 4시에 3차례 공습을 가해 국민정부 위생서, 중앙대학 실험중학교, [[장쑤성]]립 제3병원을 비롯한 비군사시설에도 마구 공격을 가했고 빈민가에도 폭탄을 퍼부어 시내 3곳에 화재가 발생해 100여명이 사망했는데 이중에 불에 타죽은 수가 절반에 달했다. 게다가 일본군이 독가스탄을 투하할 것이란 공포에 시민들은 공습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40도의 더위에도 창문을 완전히 닫고 살아야 했다. 일본군의 이런 무차별적인 폭격에 [[미국]], [[영국]], '''[[나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5개국의 대표가 항의서를 제출했다. ||어떤 나라의 정치적 수도, 특히 전쟁 상태가 아닌 나라의 수도를 향한 폭격에 대해서 인간성과 국제적 예양에 관한 배려를 필요로 하는 억제에 대해서, 일본 측 당국에 적당한 배려를 촉구해야 한다. (...) 군사적 목표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은 실제로 교육이나 재산의 무차별적인 파괴 및 민간인 사상과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84%B8%EA%B0%80%EC%99%80_%EA%B8%B0%EC%9A%94%EC%8B%9C|하세가와 기요시]] 제3함대 사령장관은 오히려 난징 시민들이 동요하고 있으니 더욱 폭격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실제로 폭격을 견디지 못한 외국인, 부유층들을 시작으로 사정이 되는 사람들이 난징을 떠나기 시작했고 전후 [[욘 라베]]는 7월에 난징 인구가 135만에 달했으나 폭격의 두려움에 수십만명이 난징을 떠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 해군이 기획한 상하이 비행장이 완성되면서 일본 해군은 1937년 9월 10일 상하이에 12,13 항공대를 합친 제2 연합 항공대[* 지휘관은 미쓰나미 데이조 대좌였다.]를 배치하고 전투기, 정찰기의 호위를 붙혀서 본격적인 주간 공습까지 실시하였다. 병원에 대한 집중공습을 비롯한 일본 해군의 야만행위에 9월 28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영국이 일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제출, 만장일치로 <여러 도시폭격에 대한 국제연맹의 대일 비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일본 항공기에 대한 지나의 무방비 도시 공중폭격 문제를 긴급 고려하여, 이러한 폭격의 결과로써 다수의 자녀를 포함한 무고한 인민에게 행해진 생명의 손해에 매우 깊은 조의를 표한다. 또한 전 세계에 공포와 의분의 마음을 생기게 한 행동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선언하고, 여기에 위의 행동을 엄숙히 비난한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도 10월 5일 '격리연설'을 통해 일본을 비난했지만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조치가 없이 경고선언만 있자 일본군부는 오히려 영미를 얕잡아보며 더욱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했다. 난징시는 8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 공습 65회, 시민과 군인 392명 사망, 438명 부상, 가옥 1,949칸 파괴를 발표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해군항공대는 11월 15일까지 26회의 공습, 600기의 비행기를 공원해 300톤을 투하했으며[* 해군항공본부 교육부장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8B%88%EC%8B%9C_%EB%8B%A4%ED%82%A4%EC%A7%80%EB%A1%9C|오니시 다키지로]]의 강연에서 나온 수치.] 12월 13일 난징 함락까지 공습 50여회에 걸쳐 900여기의 항공기를 동원해 수백톤의 폭탄[* 해군성 해군 군사보급부 <지나사변에서의 제군해군의 행동>에 나온 수치.]을 떨어뜨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